서설이 온다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눈이 내렸다. 올겨울 들어 두 번째 눈은 서설瑞雪이었으면 했다. 지난 첫눈은 우리 가슴을 아리게 했으니까. 전국을 뒤덮은 습설은 서민의 가슴을 후벼 팠다. 양적으로도 지나쳐서 교통대란을 낳았고 전국의 비닐하우스와 우리의 지붕을 무너뜨렸다. 하늘이 마구 짓눌렀다.
연말이 가깝다. 예년과 달리 이번 겨울은 큰 눈이 연달아 내린다. 눈도 눈다워야 한다. 어찌 서설만 기대하겠냐만 폭설이 습설로 오면 소시민은 감당이 어렵고, 눈과 맹추위가 겹치면 얼어붙은 경기를 더욱 얼어붙게 한다.
눈은 겨울 가뭄을 막고 겨우살이 식물에겐 이불 역할을 해 꼭 필요하다. 너무 많은 눈은 들짐승의 먹잇감을 덮어버려 필요악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물이기도 하므로 없으면 삭막하다. 지구가 너무 조용해도 문제다. 적당히 긴장하고 살아야 덜 늙는다. 환경이 파괴되고 전쟁만 아니면 된다.
지난번 눈은 한나절도 못 버텼는데 이번엔 다르다. 눈의 성분이야 별반 다르지 않지만 맹추위와 함께 찾아온 이번 눈은 이틀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갈밭을 덮고 있다. 우리 마당의 눈이야 봄까지 가지 않겠지만 새봄이 와도 얼어붙은 지구는 봄을 일깨우지는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눈을 먹는 이는 없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을 먹었다.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목이 마르면 너 나 할 것 없이 입안에서 눈을 한 주먹씩 녹여 먹고 갈증을 달랬다. 청결하기야 했겠냐만 눈 먹고 배탈 난 걸 보지 못했다. 심지어 군에 있을 적 강원도 양구로 작전 나갔다가 반합에 눈을 녹여 라면을 끓여 먹은 적이 있었다. 높은 고지에서 추위에 내맡겨진 몸에 불을 땠던 그 라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까만 밤에 하얀 눈을 녹이면서 눈물 한 방울도 찔끔 녹였었다. 계급 따지지 않고 전우와 골고루 나눠 먹으며 추위를 달랬었지.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신 뒤에 보니 솔방울 하나가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라면을 먹은 전우 한 사람도 제대를 못한 사람이 없다. 그날 배가 아프다고 의무병을 찾은 병사도 없었다. 그 당시 눈 속에도 불순물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순백의 눈은 아니었을 터.
눈을 하얀 사기그릇에 수북이 받아 녹여 보고 싶다. 사기그릇이 눈에 젖는지, 눈이 사기그릇을 더럽히는지 실험해 보고 싶다. 아마 후자가 아닐까?
민속박물관 앞 호수는 적막을 거든다
12시간째 겨울비는 훌쩍이고 있는가
이 밤을 지새워서라도 전기차는 달리고 싶다
--<와야천 일기ㆍ30, 충전 76%>
요즘 미스터트롯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케이블 양 방송사에서 경쟁하듯 방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양대 방송사에서 방영한 미스터트롯, 미스트롯은 빼놓지 않고 본방 사수하였다. 지난주부터 트롯 새로운 시즌이 도래했다. '트롯현역가왕 2'가 먼저 막을 올렸고 경쟁사에서는 '미스터트롯 3'가 이번 주에 시작되었다. 아내와 나는 TV 화면을 뚫고 그 안으로 빨려 들었다. 늦은 밤까지 방송하는 터라 화, 목요일은 일까지 접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쉬던 일을 이틀로 늘렸다. 보던 드라마도 빼놓지 않지만 밥을 굶었으면 굶었지 트롯 방송을 본방 사수하지 않으면 잠도 못 잔다. 이도 병이라면 병이 아닐까? 하지만 노년에 이 병에 걸린 들 죽고 사는 문제와 맞닥뜨리진 않겠지. 이젠 아내와 내가 출연자의 점수를 매겼을 때 마스터의 평가와 거의 틀리지 않는 수준에까지 와 있다.
그제도 밤 11시에 출근하였다. 심상치 않다 했는데 30분 후부터 눈이 흩날렸다. 아내가 배웅하면서 '눈이 오면 들어오소'라고 했지만 그러지 못할 사정이 있다. 내일 첫 방영하는 미스터트롯(3)을 편안하게 안방에서 보기 위해선 오늘은 일을 해야만 한다. 집을 나서기 전 눈이 펑펑 내렸으면 모르긴 해도 일터에 나온 이상 조심해서 손님을 모셔야 한다. 나의 지론이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안녕하세요? 눈이 오네요. 아무 데나 번화가에 떨구어 주세요. 오늘 밤, 우리는 자유 부인입니다."
"여기엔 아무 데나라는 곳은 없는데요? 아마 휘황찬란한 불빛에 흩날리는 눈이 아름다운 밤은 있을 겁니다. 그곳으로 모실까요?"
"오케이~ 아름다운 밤이 존재하는 곳으로 GO GO."
뭔가 흥에 취해 있는 듯 술에 취해 있는 듯 중년 세 사람이 내 택시에 올랐다. 이 밤 모든 것에 취하고 싶은 것일까? 택시 바퀴가 눈에 미끄러져도 눈 깜짝 안 할 테세다.
"보아하니 이곳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어요?"
"아, 네. 서울에서 왔어요. 저는 고향이 예천입니다."
"그렇군요. 아, 지금 영탁 콘서트를 하고 있지요? 내일까지 이틀 한다고 하던데 팬클럽 멤버들이었군요?"
"네. 맞아요."
예천이 고향이라는 리더인 듯한 손님에 이어서 뒷좌석의 멤버가 거들었다. 흥은 좀 가라앉았다.
"파란 점퍼가 눈에 익는다고 생각했지요. 욕먹을 질문인지 몰라도 영타기가 그렇게 좋아요?"
"말해 무얼 합니까? 작년 영탁 콘서트에 왔다가 택시 기사 양반이 영타기를 안 좋아한다고 해서 당장 그 택시에서 내렸어요."
"우리 고장 사람이고 큰 아이 한 해 선배이기도 한데, 아마 학생회장을 했다고 하지요? 서글서글한 인상에, 무엇보다 노래를 잘 하잖아요? 남자인 저도 반할 정도예요."
"그렇지요? 우리도 맹목적으로 좋아하진 않아요. 그 가수의 인성과 품성, 모든 것을 따져 보고 팬클럽에 모인 거죠. 그래서 영탁 가수가 서는 무대가 있으면 전국 어디든 찾아다니면서 힐링하고 삶의 의미를 찾곤 하죠. 몸이 고달프고 외로울 때가 없어요. 영타기가 언제든 저희 곁에 있으니까요."
진지하기까지 했다.
"황홀한 밤입니다."
"눈 길 조심하세요."
눈은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울 기세로 계속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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