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탈주'하는 행렬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비가 예보되어 있었지만 내리지는 않았다. 장마가 멈칫멈칫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전국을 강타하는 올 장마는 정말 싫다. 이러한 장맛비가 매년 반복된다면 차라리 지구를 탈주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문경 탁구 대회를 다녀온 터라 잠을 보충한 후 세상 밖을 향해 길을 나섰다. 자정이 지난 시각. 만일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면 길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비를 뚫고 한밤에 돈 벌러 탈주 대열에 낄만큼 절박하지는 앓았으니까. 오늘 하루 돈 안 벌어온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첫 손님을 어렵지 앓게 모셨다.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A 교회 앞에서 세 사람이 서있다가 손을 들었고 그중 두 사람이 차에 올랐다. 나머지 일행 한 사람은 근처에 집이 있는 듯 배웅을 했다.
"로또 복권 끊어라.''
세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인 듯, 탈 때 배웅했던 여자분에 이어 B동에서 먼저 하차한 손님도 여자분이었다. 그녀가 놓고 간 말이었다.
"줄여 볼게. 잘 가."
두 손님의 각각 한 마디의 말에서는 그들의 대화 중심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이 어렵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가 C동이라는 남자 손님의 다음 말에서 복권에 대한 심각한 대화가 있었음이 유추되었다.
"제가 복권으로 5천만 원을 날렸거든요. 지금도 계속 복권을 사고 있어요."
"네! 5천만 원요? 그랬었군요. 아까 그 친구 말씀이 그런 뜻이었군요. 저는 로또가 첨 발행될 때 호기심에 한두 번 사본 적은 있습니다만 지금은 전혀 사지를 않죠. 그거 마약과 같은 거라던데요."
"저는 이미 중독된 것 같아요. 다른 지역에 가면 무조건 복권을 사요. 이곳에서도 A, B, C동에 가면 그곳 복권방을 지나치지 못해요."
"대략 한 달에 복권 사는데 얼마 정도 쓰세요?"
"최소 5십만 원 이상이고요, 100만 원 이상 살 때도 많아요."
"아이고, 무리세요. 한 달 생활비를 복권에 탕진하다니요. 탕진이란 말은 죄송합니다만 줄여야 할 것 같아요. 단번에 끊기 어렵다면 지금은 줄이는 게 상책입니다.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말하긴 했어요. 건성으로 대답은 했습니다만. 저만 번호를 못 맞히는 것 같아요. 제 딸은 한 번 만에 다섯 개를 맞혀서 백칠십만 원을 탔어요. 저는 5천만 원어치를 사고도 5만 원짜리 두 번 맞힌 게 전부입니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제 지인 중의 한 사람은 복권으로 옥토를 다 날리고 부인으로부터 이혼 당한 후 달방을 살다가 지병이 도져서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깁니다만 저도 별거를 하고 있어요. 아내에게 아파트를 내주고 지금 혼자 원룸에 살아요. 1등 되면 아파트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물론 기적이라는 건 있습니다만 확률적으로 계산하면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곳에 목표 지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는 포기가 안 돼요."
"복권이란, 그 말 자체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복을 주고 내겐 일주일을 기다리면서 아주 작은 희망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봐요."
"저도 그걸 알지만 잃은 돈이 아까워서 미련을 못 버려요."
"1등 당첨된 사람도 통계적으로 봤을 때 그 돈으로 행복을 찾아간 사람이 훨씬 적었다고 하잖아요?"
택시는 목적지인 D동 원룸촌에 닿고 있었다. 50대 걸음걸이가 저처럼 빠른 줄 몰랐다. 그는 무엇에 쫓기 듯 원룸 숲으로 숨어들었다. 누가 그를 쫓아가고 그 남자는 뭣에 저리도 쫓기는가.
태풍 지나고
머리 위에 별 몇 점 떴다
그 밖 별이
어디 갔나 했더니 풀숲에 있네
하늘은 별님을 채근하여
지구에 보냈나 봐
--<귀촌 일기ㆍ241,개똥벌레>
'오늘 9시 30분 이후 영화표 2장 예약 부탁요. 내가 영화 한 편 보고 글을 써야 하는 게 있어서...'
그제 가족 카톡 방에 메시지를 던진 지 3분이 지나지 않아 둘째로부터 영화표 2장이 배달되었다. 가까운 영화관이었다. 그날도 소나기 지나간 뒤 비가 주춤해서 우산 없이 아내와 집을 나섰다.
제목도 모르고 영화관에 갔다. 젊은 사람들을 따라 팝콘 하나도 샀다. 영화관은 한산했다.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우리 포함 채 열 명이 안 되는 인원을 위해 등은 꺼지고 스크린에 점이 찍혔다.
공포를 조성하는 쇳소리, 총 소리, 어두운 화면... 겨우 10명의 관객을 사로잡기 위한 퍼포먼스 치고는 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주! 그제야 영화 제목을 알았다. 주로 배경은 휴전선 북쪽이었는데 이념을 달리하는 남자들의 쫓기고 쫓는 장면이 전개된다. 이데올로기를 밑바탕에 깔고는 있었지만 주제와 맞닥뜨리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잠시 지구를 빌러 쓰다 간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쫓기고 쫓는 행위를 반복한다. 어떨 때는 쫓는 자이고, 때로는 쫓기는 자로 변신하기도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전자일까, 후자를 선택해야 하나? 별 의미는 없다. 언제나 쫓는 자일 수만 없다는 것.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역할이 바뀌는 것도 순간이다. 단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질주를 했는가에 따라 운명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
어차피 우리는 탈주를 위해 지구에 왔다. 올 때도 내 의지에 의해 오지 않았지만 지구를 탈주하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다. 먼지 알갱이 같은 보이지도 않는 점 하나 남기도 떠날 지구에 머무는 찰나의 순간을 후회 없이 살다 갈 일이다.
나는 오늘도 세상 밖을 향해 탈주를 계속한다. 내 택시는 누구를 쫓아가지도 않고 누구로부터 쫓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곳에서 안주할 수는 없다. 도망자가 아닌 세상 밖으로의, 비를 뚫고 행복한 탈주를 계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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